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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학위논문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 관계망 구현 및 분석 연구 - 호산외사, 이향견문록, 희조일사를 중심으로 - 한 국 학 중 앙 연 구 원 인 문 정 보 학 전 공 : 김 지 선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 관계망 구현 및 분석 연구dh.aks.ac.kr/~jisun/edu/images/7/79/김지선_석사... · 2020. 9. 17. · 그림 Ⅳ-2. Neo4j 출력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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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사학위논문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관계망 구현 및 분석 연구

    - 호산외사, 이향견문록, 희조일사를 중심으로 -

    한 국 학 중 앙 연 구 원

    한 국 학 대 학 원

    인 문 정 보 학 전 공 : 김 지 선

  •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

    관계망

    구현

    분석

    연구

    2019

    김지선

  • 석사학위논문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관계망 구현 및 분석 연구

    - 호산외사, 이향견문록, 희조일사를 중심으로 -

    지도교수 김 현

    한 국 학 중 앙 연 구 원

    한 국 학 대 학 원

    인 문 정 보 학 전 공 : 김 지 선

  •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관계망 구현 및 분석 연구

    - 호산외사, 이향견문록, 희조일사를 중심으로 -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2018. 11. 30.)

    한 국 학 중 앙 연 구 원

    한 국 학 대 학 원

    인 문 정 보 학 전 공 : 김 지 선

  • - i -

    목 차

    국문초록 ··········································································· ⅶ

    Ⅰ. 서론 ············································································ 11. 연구 배경 및 목적 ···························································· 12. 연구 대상 및 방법 ···························································· 6

    Ⅱ. 19세기 여항전기집의 저자와 편찬 체재 및 특징 ···············111. 호산외사의 저자와 편찬 체재 ········································· 112. 이향견문록의 저자와 편찬 체재 ······································ 143. 희조일사의 저자와 편찬 체재 ········································· 184. 세 문헌 사이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특징 ···························· 22

    Ⅲ. 온톨로지 설계 및 데이터베이스 편찬 ····························· 261. 온톨로지 설계 맥락과 내용 ··········································· 26

    1) 온톨로지 설계 근거 ····························································· 262) 클래스(Class) 및 개체 속성(Attribute) 설계 ··························· 293) 관계(Relation) 설계 ····························································· 42

    2. 데이터베이스 편찬 맥락과 규모 ···································· 46

    Ⅳ. 시맨틱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발견되는 이야기 ················· 491. 세 문헌의 저자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야기 ·························· 492. 저자와 입전인물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야기 ························ 57

    1) 저자와 입전인물 사이의 관계가 직접적인 경우 ····················· 572) 저자와 입전인물 사이의 관계가 간접적인 경우 ····················· 86

    3) 저자와 입전인물 사이의 관계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 ············ 136 3. 세 저자와 공동입전 인물 16인 사이의 관계망 구현 ··········· 152

    Ⅴ. 결론 ········································································ 156 참고 문헌 ······································································· 158Abstract ·········································································· 165

  • - ii -

    표 목 차

    표 Ⅰ-1. 대상 문헌별 입전 인물 수 ············································································ 7

    표 Ⅱ-1.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에 따른 입전 기준 ······················ 17

    표 Ⅱ-2. 서희조일사후(書熙朝軼事後)에 따른 입전 기준 ································ 22

    표 Ⅱ-3. 세 문헌 공동 입전 인물 대상 작품 인용서 ··········································· 24

    표 Ⅲ-1. 온톨로지의 클래스(Class) 항목 8가지 ····················································· 29

    표 Ⅲ-2. 개별 개체의 공통 속성 ·············································································· 31

    표 Ⅲ-3. 인물 클래스의 속성 항목 ·········································································· 32

    표 Ⅲ-4. 작품 클래스의 속성 항목 ·········································································· 35

    표 Ⅲ-5. 판본 클래스의 속성 항목 ········································································ 36

    표 Ⅲ-6. 저서 클래스의 속성 항목 ·········································································· 38

    표 Ⅲ-7. 서화 클래스의 속성 항목 ·········································································· 39

    표 Ⅲ-8. 성씨 클래스의 속성 항목 ········································································ 40

    표 Ⅲ-9. 시사 클래스의 속성 항목 ·········································································· 40

    표 Ⅲ-10. 관서 클래스의 속성 항목 ·········································································· 41

    표 Ⅲ-11. 온톨로지의 관계(Relation) 항목 ····························································· 42

    표 Ⅲ-12. 인물-인물 사이의 관계(Relation) 항목 ················································· 45

    표 Ⅲ-13. 전체 데이터 규모 ······················································································· 47

    표 Ⅳ-1. 「고조비증숙부인김씨묘갈」에 근거해 재구성한 박태성의 연보 ············ 87

    표 Ⅳ-2. 여러 기록을 통해 재구성한 신두병의 행적 ··········································· 151

  • - iii -

    그 림 목 차

    그림 Ⅱ-1. 이경민 세계도(世系圖) ························································· 20

    그림 Ⅲ-1. 온톨로지 표현(인물-문헌-인물) 예시 ····································· 26그림 Ⅳ-1. Neo4j 출력 이미지 : 세 여항전기집 저자 사이의 관계 1 ················· 50

    그림 Ⅳ-2. Neo4j 출력 이미지 : 세 여항전기집 저자 사이의 관계 2 ········· 51

    그림 Ⅳ-3. Neo4j 출력 이미지 : 세 여항전기집 저자 사이의 관계 3 ········· 52

    그림 Ⅳ-4. Neo4j 출력 이미지 : 세 여항전기집 저자 사이의 관계 4 ········· 53

    그림 Ⅳ-5. Neo4j 출력 이미지 : 세 여항전기집 저자 사이의 관계 5 ········· 54

    그림 Ⅳ-6. Neo4j 출력 이미지 : 세 여항전기집 저자 사이의 관계 6 ········· 56

    그림 Ⅳ-7. Neo4j 출력 이미지 : 전기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58

    그림 Ⅳ-8. Neo4j 출력 이미지 : 전기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59

    그림 Ⅳ-9. Neo4j 출력 이미지 : 전기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60

    그림 Ⅳ-10. Neo4j 출력 이미지 : 전기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61

    그림 Ⅳ-11. Neo4j 출력 이미지 : 전기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62

    그림 Ⅳ-12. Neo4j 출력 이미지 : 전기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6 ············· 63그림 Ⅳ-13. Neo4j 출력 이미지 : 조수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64

    그림 Ⅳ-14. Neo4j 출력 이미지 : 조수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64

    그림 Ⅳ-15. Neo4j 출력 이미지 : 조수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65

    그림 Ⅳ-16. Neo4j 출력 이미지 : 조수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66

    그림 Ⅳ-17. Neo4j 출력 이미지 : 조수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68

    그림 Ⅳ-18. Neo4j 출력 이미지 : 조수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6 ·········· 69

    그림 Ⅳ-19. Neo4j 출력 이미지 : 임희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71

    그림 Ⅳ-20. Neo4j 출력 이미지 : 임희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72

    그림 Ⅳ-21. Neo4j 출력 이미지 : 임희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73

    그림 Ⅳ-22. Neo4j 출력 이미지 : 조신선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74

  • - iv -

    그림 Ⅳ-23. Neo4j 출력 이미지 : 조신선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75

    그림 Ⅳ-24. Neo4j 출력 이미지 : 조신선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76그림 Ⅳ-25.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78

    그림 Ⅳ-26.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79

    그림 Ⅳ-27.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80

    그림 Ⅳ-28.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81

    그림 Ⅳ-29.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83

    그림 Ⅳ-30.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6 ·········· 84

    그림 Ⅳ-31. Neo4j 출력 이미지 : 박윤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7 ·········· 86

    그림 Ⅳ-32. Neo4j 출력 이미지 : 박태성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88

    그림 Ⅳ-33. Neo4j 출력 이미지 : 박태성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89

    그림 Ⅳ-34. Neo4j 출력 이미지 : 박태성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90

    그림 Ⅳ-35. Neo4j 출력 이미지 : 박태성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91

    그림 Ⅳ-36. Neo4j 출력 이미지 : 왕태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94그림 Ⅳ-37. Neo4j 출력 이미지 : 왕태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95

    그림 Ⅳ-38. Neo4j 출력 이미지 : 왕태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96

    그림 Ⅳ-39. Neo4j 출력 이미지 : 엄 열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97

    그림 Ⅳ-40. Neo4j 출력 이미지 : 엄 열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98

    그림 Ⅳ-41. Neo4j 출력 이미지 : 엄 열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99

    그림 Ⅳ-42. Neo4j 출력 이미지 : 엄 열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01

    그림 Ⅳ-43. Neo4j 출력 이미지 : 엄 열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101

    그림 Ⅳ-44. Neo4j 출력 이미지 : 엄 열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6 ······· 103

    그림 Ⅳ-45. Neo4j 출력 이미지 : 유세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04

    그림 Ⅳ-46. Neo4j 출력 이미지 : 유세통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06

  • - v -

    그림 Ⅳ-47. Neo4j 출력 이미지 : 이단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07

    그림 Ⅳ-48. Neo4j 출력 이미지 : 이단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08그림 Ⅳ-49. Neo4j 출력 이미지 : 최북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09

    그림 Ⅳ-49. Neo4j 출력 이미지 : 최북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10

    그림 Ⅳ-51. Neo4j 출력 이미지 : 최북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12

    그림 Ⅳ-52. Neo4j 출력 이미지 : 최북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13

    그림 Ⅳ-53. Neo4j 출력 이미지 : 김홍도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14

    그림 Ⅳ-54. Neo4j 출력 이미지 : 김홍도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15

    그림 Ⅳ-55. Neo4j 출력 이미지 : 이언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16

    그림 Ⅳ-56. Neo4j 출력 이미지 : 이언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16

    그림 Ⅳ-57. Neo4j 출력 이미지 : 이언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17

    그림 Ⅳ-58. Neo4j 출력 이미지 : 이언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18

    그림 Ⅳ-59. Neo4j 출력 이미지 : 이언진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119

    그림 Ⅳ-60. Neo4j 출력 이미지 : 천수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20그림 Ⅳ-61. Neo4j 출력 이미지 : 천수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21

    그림 Ⅳ-62. Neo4j 출력 이미지 : 천수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22

    그림 Ⅳ-62. Neo4j 출력 이미지 : 천수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23

    그림 Ⅳ-64. Neo4j 출력 이미지 : 장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25

    그림 Ⅳ-65. Neo4j 출력 이미지 : 장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25

    그림 Ⅳ-66. Neo4j 출력 이미지 : 장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27

    그림 Ⅳ-67. Neo4j 출력 이미지 : 장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27

    그림 Ⅳ-68. Neo4j 출력 이미지 : 장혼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128

    그림 Ⅳ-69. Neo4j 출력 이미지 : 박영석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30

    그림 Ⅳ-70. Neo4j 출력 이미지 : 박영석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31

  • - vi -

    그림 Ⅳ-71. Neo4j 출력 이미지 : 박영석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32

    그림 Ⅳ-72. Neo4j 출력 이미지 : 박영석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33그림 Ⅳ-73. Neo4j 출력 이미지 : 박영석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134

    그림 Ⅳ-74. Neo4j 출력 이미지 : 박영석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6 ········ 135

    그림 Ⅳ-75. Neo4j 출력 이미지 : 이익성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 137

    그림 Ⅳ-76. Neo4j 출력 이미지 : 김종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40

    그림 Ⅳ-77. Neo4j 출력 이미지 : 김종귀와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40

    그림 Ⅳ-78. Neo4j 출력 이미지 : 김수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42

    그림 Ⅳ-79. Neo4j 출력 이미지 : 김수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43

    그림 Ⅳ-80. Neo4j 출력 이미지 : 김수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44

    그림 Ⅳ-81. Neo4j 출력 이미지 : 김수팽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45

    그림 Ⅳ-82. Neo4j 출력 이미지 : 신두병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1 ········ 147

    그림 Ⅳ-83. Neo4j 출력 이미지 : 신두병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2 ········ 147

    그림 Ⅳ-84. Neo4j 출력 이미지 : 신두병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3 ········ 148그림 Ⅳ-85. Neo4j 출력 이미지 : 신두병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4 ········ 150

    그림 Ⅳ-86. Neo4j 출력 이미지 : 신두병과 세 저자 사이의 관계 5 ········ 150

    그림 Ⅳ-87. 세 저자와 공동입전 인물 16인 사이의 관계망 ···················· 152

    그림 Ⅳ-88. 세 저자와 공동입전 인물 16인 사이의 관계망 : 조희룡 ······· 153

    그림 Ⅳ-89. 세 저자와 공동입전 인물 16인 사이의 관계망 : 이경민 ······· 154

    그림 Ⅳ-90. 세 저자와 공동입전 인물 16인 사이의 관계망 : 박윤묵 ······· 154

  • - vii -

    국문초록

    19세기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 관계망 구현 및 분석 연구-호산외사, 이향견문록, 희조일사를 중심으로-

    김 지 선

    한문 산문의 전통적 갈래 가운데 하나로서 전(傳)은 한 인물의 일생 또는 생애의 부분적 일면을 소재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특수성을 갖는다. 실존했던 인물의 삶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구체적 내용으로 다룬다는 측면에 주목할 경우, 문학 장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담은 사료(史料)로서 전(傳)이 수용될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고 하겠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그동안 주로 문학 방면에서 연구되어온 19세기 중엽의 여항전기집(閭巷傳記集)을 사료로 수용하고, 그 안에 담긴 여러 인물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여항전기집에 담긴 여러 인물과 인용 문헌 등의 사실 정보를 디지털 환경에서의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하여 데이터 간의 관계를 섬세하게 살펴볼 경우, 기존에 주목하지 못했던 여러 유의미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은 구체적 문헌은 19세기의 대표적 여항전기집으로 알려진 호산외사(壺山外史),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희조일사(熙朝軼事)이다. 세 문헌에 모두 입전된 20명의 인물을 기준으로 그들이 속한 가문, 몸담았던 관청과 시사(詩社), 관계 맺었던 여타 입전 인물 및 비입전 인물, 그들을 언급한 구체적 문헌 등 여러 정보를 온톨로지로 설계하고 시맨틱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하였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주 연구대상으로 삼은 세 문헌뿐만 아니라 문집, 고문서, 족보와 같은 여타 고문헌 자료 및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같은 대표적 관찬 사료 또한 폭넓게 참고하였다. 이렇게 편찬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세 여항전기집 저자들 사이의 관계, 입전 인물과 저자들 사이의 관계, 입전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펴봄으로써, 조선 후기 여항인들의 이야기가 여러 문헌을 거쳐 수용된 맥락을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유의미한 이야기들을 정리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편찬된 데이터베이스는

  • - viii -

    웹에 공개되어 있으며, 향후 디지털 인문학 연구방법론을 통해 해당 데이터베이스가 여러 연구자에 의해 공유·활용될 경우 19세기 여항문학의 성격, 여항인의 신분과 활동 범위 등 조선 후기 여항 문화의 외연을 더욱 폭넓게 탐구하는 데 있어서 또한 이바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주제어 : 여항문학, 여항인, 중인, 여항전기집, 호산외사, 호산외기, 이향견문록, 희조일사, 조희룡, 유재건, 이경민, 데이터베이스, 인물 관계망, 인문정보학, 디지털 인문학, 閭巷, 傳記

  • - 1 -

    Ⅰ. 서론

    1. 연구배경 및 목적

    19세기 중엽 중인층 작가가 여항인(閭巷人)1)을 대상으로 저술한 독립적 성격의 여항전기집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호산외사(壺山外史, 1854년 이후)2),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1862년), 희조일사(熙朝軼事, 1866년)가 그것이다.3) 세 문헌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여항전기집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개별 작가, 개별 작품론, 편찬의식의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해당 연구들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여항전기집의 편찬 배경을 설명하면서 19세기의 특수한 시대사적 요인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19세기의 특수한 시대사적 조건으로 거론되는 것 중 하나로 사회적 혼란에 따른 신분제 동요를 들 수 있다. 19세기 중엽 장동 김씨, 풍양 조씨와 같은 소수 가문에 정치적 권력의 집중화 현상이 일어남에 따라 삼정의 문란이 야기되었고, 그 결과 1862년에는 임술민란과 같은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치적 권력의 일원화에 따라 발생한 관료 사회의 부패와 피지배층의 신분적 갈등이 사회적 혼란을 촉발했고, 이 와중에 중인들 또한 1851년 통청운동과 같은 움직임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힘으로써 기존의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취하였다. 그와 같은 움직임은 중인층의 경제·사회적 성장과 관련이 있다. 경제적 활동을 통

    1) '여항인'의 범주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그 정의를 달리하고 있다. 허경진(1997 : 42)은 지배층에서 제외된 모든 계층이 곧 위항인이라 하였고, 정옥자(2003 : 19)는 ‘중인 이하 상인(평민)과 천민을 포함’하는 계층이라 하였으며, 윤재민(2004 : 330)은 여항인이 ‘조선 후기에 양반층이 자신을 제외한 여타 부류를 싸잡아 지칭한 데서 연유한 용어’라고 하였다. 논자는 허경진, 정옥자, 윤재민의 주장에 따라 사대부가 아닌 非양반계층을 포괄하는 용어로 여항인에 대한 정의를 전제하고자 한다.

    2) 壺山外史의 서명은 판본마다 다른데, 본고에서는 수경실 소장본 壺山外史의 표제 서명을 따르기로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 근거는 ‘Ⅰ-2. 연구대상 및 방법’에서 후술하였다.

    3) 연구자에 따라서 19세기 중엽 여항전기집의 범주에 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1830~ 40년대 추정), 진휘속고(震彙續攷)(1844~1862년 추정), 신광현의 위항쇄문(委巷瑣聞)(1858~1862년 추정)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추재기이는 추재집 권7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 문집의 일부분으로 간행된 것이지 독립적인 전기집으로 편찬된 것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전기집의 주요한 목적이 ‘인물’에 초점을 두고 해당 인물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한 것임을 고려할 때, 추재기이는 정사(正史)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당 인물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집보다는 오히려 야담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위항쇄문은 야담, 필기, 시화, 잡록, 패사 등 다양한 성격의 글들이 혼재되어 있고,(한영규, 2014b : 103) 진휘속고는 편찬자와 편저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고려시대 인물부터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두 저서 또한 엄밀하게 여항전기집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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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부를 축적한 중인층은 시사(詩社)를 조직함으로써 양반층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고급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계층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예컨대, 풍요속선(風謠續選)과 같은 여항인 공동시집의 편찬 목적은 여항인 집단의 문학적 역량을 드러냄과 동시에 양반들과 비교할 시 그들 또한 지적·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인정받고자 한 시도로 해석 가능하다. 이러한 문화 활동과 관련해서 영·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으로 인한 문화 활동 반경이 확대된 사실을 짚어볼 수 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여항인 또는 중인 계층의 문화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그 구체적 예로서 서족(庶族)이 청요직에 오를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한 것을 거론할 수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재위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도 여항인 또는 중인을 대상으로 한 영조의 정책을 계승·확대하는 방향을 취했다.4) 18세기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는 조정의 정책적 지원 또한 여항인들의 문예 활동에 영향을 준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18-19세기 사상 조류의 변화 또한 당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서학(西學) 전래에 따른 서구문물의 유입과 청나라의 급격한 쇠퇴는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 온 성리학적 질서가 흔들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명 말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양명학의 수용과 그와 맞물려 발생한 천기론(天機論)의 대두 그리고 천주교(西敎)의 확산에 따라 전통적 성리학의 질서에서 탈피하여 주체적 개인을 자각하고 평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식이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던 가운데 중인들을 중심으로 한 여항전기집 저술 및 간행 또한 이루어진 것이다.5) 이와 같이 거대한 시대사적 조류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 양상의 하나로서 ‘여항전기집 편찬’의 의미를 조망해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여항전기집 편찬’이라는 특수한 사건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해당 문헌들에 담긴 구체적 내용들을 섬세하게 정리해보는 시도 또한 필요하다 판단된다. 실제 개

    4) 안대회, 「조선 후기 閭巷文學의 성격과 지향」, 한문학보, 제29집, 우리한문학회, 2013, 279~280쪽.

    5) 19세기 여항전기집의 편찬 배경에 있어서 당시의 여러 시대사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서술은 기존 연구들로부터 도출된 내용들을 정리한 결과이다. 18-19세기 조선 사회의 특징적 요소들이 여항전기집 편찬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데 있어서는 대부분의 연구가 동의하는 바이겠으나, 그 가운데 핵심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는 개별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다. 예컨대 강명관(1997)은 여항 문식층의 형성을, 허경진, 앞의 책(1997)은 중인층의 시사 조직 및 활동을, 안대회, 앞의 논문(2013)과 정옥자, 앞의 책(2003)은 영정조 시대의 문예부흥과 여항인들의 자아에 대한 인식을 주요 원인으로 거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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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전기집 편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단서가 해당 문헌에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경우, 전기집의 중심 소재로 다루어지는 인물들과 저자 사이의 관계 또는 수록된 인물들 사이에 드러나는 특징적인 역학 관계가 여항전기집 편찬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개별 전기집을 대상으로 작가의 편찬의식을 분석한 문학적 성격의 연구들이 은연중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는다고 하겠다. 편찬자의 삶에서 발견 가능한 삶의 특수한 일면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로부터 여항전기집을 편찬하게 된 특수한 동기를 부분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학 방면에서 여항전기집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대부분 문헌으로서 여항전기집에 담긴 특질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였을 뿐, 실제 여항전기집 내부에 담긴 여러 내용을 다각도로 정리해서 그로부터 드러나는 구체적 양상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살펴보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이유로 여러 요인을 거론할 수 있겠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 요인으로, 장르적 시각에서 여항전기집을 바라보는 특수한 경향성을 언급할 수 있다. 한문 문체의 대표적 장르 가운데 하나로서 전기(傳記)는 자료에 담긴 사실로서의 정보보다는 작품의 문학성에 초점을 둔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전기의 문체적 특성 때문인데, 그 장르적 기원을 살펴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장르로서 전기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의 경우 기본적으로 역사 서술이지만, 역대로 그 문학성에서 또한 큰 가치를 인정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사실정보 뿐만 아니라 서술자의 주관적인 시각과 과장된 묘사 및 해석 등 작자의 독창적인 문예적 취미(taste)가 함께 반영되므로, 전기는 일정부분 이상 창작의 성격도 포함한다고 하겠다. 여항전기집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그러한 전통적 문체로서의 장르 의식에 기초하여 그것이 내포한 문학성을 밝히는 데 주로 초점을 두고 연구가 이루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기는 한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문체로서, 장르적 시각에 입각했을 때 ‘전(傳)’과 ‘기(記)’는 일부 허구적 성격의 요소를 담고 있으나, 실제 주된 목적은 실존했던 인물 또는 인물과 관련된 사건이 멸실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6) 전기가 본질적으로 해당 인물에 대한 기억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목적성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7)을 고려할 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 또한 있다고

    6) 전과 기의 구분적 위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저를 참고할 수 있다. 심경호, 한문산문미학, 고려대학교출판부, 2013년, 274쪽.

    7) 신승훈, 「"전(傳)", 역사(歷史)와 문학(文學)의 경계(境界)」, 동방한문학, 제67권, 동방한문학회, 2016,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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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기라는 장르적 시각에서 벗어나, 여항전기집을 사료로 보고 그 안에 담긴 내용 가운데 사실로서의 정보들을 정리해서 연구를 시도한 일부 사례들이 있다. 하단의 4가지 연구가 그에 해당한다. 문경호8)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역사기록으로 수용하고, 입전된 작품을 통해 중인의 생활과 그로부터 드러나는 의식적 특질을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그는 이향견문록이 지닌 사료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이향견문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를 대상으로 인용과정에서의 변화를 분석하고, 입전 작품 5편9)과 실제 정사 자료를 비교함으로써 사실 위주의 기록이 담긴 중인 역사서로서 이향견문록이 수용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해당 연구의 아쉬운 측면은 상대적으로 표본이 적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구는 역사적 시각에서 여항전기집에 접근하여 그로부터 유의미한 사실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권기석10)은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입전된 인물의 생몰 연대, 활동 시기, 거주지, 신분 등의 정보를 분석하여 위항인의 범주 및 신분적 위상을 확인하고, 서술된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위항인 계층의 신분의식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였다.11) 문경호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작품들로부터 사실 정보를 추출해서 분석을 시도하였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이향견문록에서 추출한 사실 정보의 진위여부를 여타 자료와의 연계를 통해 검토함으로써 데이터의 엄밀성을 보완하였다면 더욱 섬세한 연구가 가능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박철상12)은 호산외사의 이본 이후시금록(以後今視錄)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호산외사의 저술 배경 및 저술 과정과 입전 기준을 밝혔다. 호산외사의 입전 맥락을 분석한 기존 연구의 경우 조희룡의 교유관계와 그가 친분을 맺었던 인물들을 간단히 언급해 주는 정도에서 입전 근거를 해명하였을 뿐 작품 분석을 통해 드러난 사실 정보를 기타 자료와 연계하여 검토함으로써 구체적 입전 기준이 무엇인지에까

    8) 문경호, 「이향견문록을 통해 본 조선후기 중인문화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9) 「유희경전(劉希慶傳)」, 「오효성전(吳孝誠傳)」, 「김지남전(金指南傳)」, 「조생전(曺生傳)」, 「홍순언전(洪純彦傳)」이 이에 해당한다.

    10) 권기석, 「이향견문록 수록 인물의 사회계층적 위상과 신분 관념」, 조선시대사학보, 제72권, 조선시대사학회, 2015, 269~338쪽.

    11) 권기석 이전에 이향견문록 입전 인물을 대상으로 출신 신분, 직업, 성별을 분석하여 입전 양상을 살펴본 시도를 한 연구로서 김순용(2003)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연구는 이향견문록을 문학작품으로 전제하였다는 측면에서 권기석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12) 박철상, 「이후시금록(以後視今錄)을 통해 본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 한문학보, 29권, 우리한문학회, 2013, 299~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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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해당 연구의 주목할만한 점은, 그러한 측면에서 여러 문헌 자료를 검토하고 정리함으로써 호산외사에 입전된 인물들과 관련된 사실 정보를 복합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입전 근거를 보다 명확하게 밝혔다는 사실이다. 홍단비13)는 호산외기에 실린 6편의 화가전14)을 미술사적 사료로 수용하여, 입전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조희룡의 회화관을 살펴보았다. 해당 연구의 주목할 만한 지점은 호산외기에 서술된 내용뿐 아니라, 조희룡이 유배기간 동안 입전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 유배 이후 저술한 산문집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 기록된 일화 그리고 그림의 화제 등을 근거로 조희룡과 입전 화가들이 맺고 있던 관계의 양상을 밝혔다는 점이다. 43명 가운데 6명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구체적 문헌 자료를 근거로 작가와 입전 인물 사이의 친분 거리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입전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 첫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위의 4가지 연구는 문학적 관점에서 여항전기집의 성격을 주로 밝히고자 하였던 기존 연구들과 달리, 여항전기집을 사료로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그것을 정리하고 그로부터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사료로서 전기집을 바라볼 시 ‘사실’로서 정리해야 할 관련 내용의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전기집 편찬에 영향을 미쳤을 요소들이 무엇인지에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본 연구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의 연장 선상에서 여항전기집을 사료로 전제하고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여러 사실 정보들을 정리함으로써, 세 여항전기집 수록 인물들의 입전 근거 또는 편찬 과정에 반영되었을 당시 인물들의 교유 관계에 관한 여러 정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단일 문헌을 대상으로 삼아 상대적으로 표본 범위가 넓지 않고 전기집 외에 여타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앞서의 연구 사례들의 한계점을 보완하여, 세 여항전기집을 모두 연구 대상으로 삼고, 여타 사료나 족보 및 문집에서 발견 가능한 관련 정보를 디지털 데이터 형식으로 가공함으로써 개별 데이터 간에 어떠한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선형적으로 서술된 전기집의 내용을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해 비선형적으로 재구성해 다각도로 들여다봄으로써, 개별 전기집 편찬에 영향을 미친 당시 인적 네트워크의 구체적 양상이 무엇인지 짚어보고 더 나아가 먼저 간행된 전기집이 후차 편찬된 전기집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구체적 단서를 밝혀보고

    13) 홍단비, 「호산외기 화가전을 통한 조희룡의 회화관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14) 「최북전(崔北傳)」, 「임희지전(林熙之傳)」, 「김홍도전(金弘道傳)」, 「김영면전(金永冕傳)」, 「이재관전(李在寬傳)」, 「전기전(田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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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하는 시도이다. 각각의 전기집 편찬에 얽힌 여러 인물들이 당대 여항문화의 주축을 담당하였음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접근이 그동안 모호하게 다루어져 왔던 ‘여항인’의 실체를 밝히는 데 일조하고, 19세기 여항문화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또한 기여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2. 연구대상 및 방법

    본 연구는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이경민의 희조일사(熙朝軼事)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되15), 개별 작품의 ‘내용’을 기준으로 그 안에 담긴 모든 사실 정보를 환산할 경우 연구범위가 광범위해지기 때문에 입전된 ‘인물’을 구체적인 연구 기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 세 문헌에 입전된 인물 328명을 모두 연구 대상으로 삼아 연구를 진행하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세 문헌에 공동으로 수록된 인물 20명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들과 관련된 여타 입전 인물들까지 포괄해서 정리해 나가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세 문헌에 모두 입전된 인물 20명은 박태성(朴泰星), 김수팽(金壽彭), 유세통(庾世通), 이언진(李彦瑱), 최북(崔北), 이단전(李亶佃), 임희지(林熙之), 이익성(李益成), 김홍도(金弘道), 김종귀(金鍾貴), 박영석(朴永錫), 조신선(曺神仙), 엄열부(嚴烈婦),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왕태(王太), 신두병(申斗柄), 박윤묵(朴允默), 조수삼(趙秀三), 전기(田琦)이다.16)

    15) 본고에서 참고한 세 문헌에 대한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호산외사는 박철상(2013)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수경실(修綆室) 소장 壺山外史의 입전

    인물 목록 및 순서를 참고하였다. 이향견문록 서문 및 인용서목과 희조일사 인용서목, 그리고 두 문헌에 수록된 작품 인용서로 壺山外記가 기재되어 있음에도 논자가 수경실 소장 호산외사(壺山外史)를 중심 문헌으로 삼은 이유는 호산외사와 이향견문록 두 문헌에 공동으로 입전된 함진숭(咸鎭嵩) 때문이다. 이향견문록 권1에 수록된 「함판향진숭(咸瓣香鎭嵩)」에는 그 인용서가 호산외기(壺山外記)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함진숭(咸鎭嵩)에 대한 이야기는 수경실 소장본에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판본 중에서도 수경실본 호산외사를 중심 문헌으로 삼았다. 호산외사 원문과 번역본에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조희룡(趙熙龍), 호산외사(壺山外史)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奎6755) ; 조희룡(저)/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역), 趙熙龍 全集 6-壺山外記, 한길아트, 1999f.

    - 이향견문록 원문과 번역본에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유재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이조후기 여항문학총서 9, 여강출판사, 1991 ; 유재건(저)/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역), 이향견문록, 문학동네, 2008.

    - 희조일사의 경우, 희조일사(熙朝軼事)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가람古 920.051-Y55h)를 기본으로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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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문헌 1문헌 2문헌 3문헌 총 입전인물

    호산외사 6명 17명20명

    43명/40목록

    이향견문록 219명 313명/287목록57명희조일사 8명 85명/84목록

    〔표Ⅰ-1〕 대상 문헌별 입전 인물 수(총 411편/328명)

    호산외사, 이향견문록, 희조일사의 순서로 이어지는 여항전기집 편찬의 흐름 속에서 해당 20명의 인물들만이 세 작가들 모두에 의해 선택되고 재입전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당 인물 20명은 19세기 여항전기집 편찬 맥락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세 전기집에 수록된 인물들을 살펴볼 경우 겹치거나 삭제되거나 새롭게 입전된 인물들이 있는데, 이는 저자와 수록 인물 사이 또는 수록 인물들 사이의 역학 관계가 세 전기집의 편찬 과정에서 반영된 결과로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저자와 수록 인물들 사이의 실제 친분 관계는 특정 인물이 전기집에 입전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되며, 그러한 사실을 짚어보는 데 있어서 20명의 공동수록 인물들은 매우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20명의 공동수록 인물이 여타 인물들을 포괄해서 저자와 입전 인물들 사이의 친분 관계를 드러내 줄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면, 실제 해당 인물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를 맺고 얼마나 가깝게 교유하였는지 그 구체적 양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문헌이다. 가령, 세 문헌에서 인용된 문집의 경우, 작가와 인용 문집의 작가, 입전 인물과 인용 문집의 작가 사이에 구체적인 친분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 전제해 볼 수 있다. 특정 인물에 대한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다른 문헌으로부터 내용을 참고하거나 해당 문헌의 내용을 통째로 인용한다면, 그 또한 해당 문헌의 신뢰성 확보에 있어서 현실에서의 특수한 인간관계가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향견문록과 희조일사는 인용 문헌의 작가 또한 전체 관계망에 담아야 할 인물 요소로서 함께 고려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용 문헌 가운데는 중인들에 의해 작성된 문헌들뿐만 아니라 양반들에 의해 작성된 글들도 많은데, 이를 매개로 당시 중인 또는 여항인과 양반 사

    16) 순서는 호산외사 (수경실본) 입전 순서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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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 교유 관계 또한 살펴볼 수 있다. 실제 양반들의 문집 자료에 여항인들이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면 대부분 언급된 여항인과 양반 사이의 직간접적인 교유 관계를 서술한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관찬 사료 및 방목(榜目) 기록, 중인 가계를 대상으로 한 족보인 성원록 및 기타 족보 자료, 중인 또는 여항인들의 문집 및 양반들의 문집도 대상 자료로 활용하였다. 세 전기집의 저자와 입전 인물들 및 그들의 가계(家系)에 속하는 인물들, 직간접적으로 교유한 중인들과 양반들 및 추가적으로 그 관계망에 중간 요소로 속하는 부가적 인물들 또한 모두 연구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들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는 문헌은 모두 참고 자료로 삼은 결과이다. 이는 곧 본 연구가 단순히 세 전기집의 작가와 수록 인물들 사이의 교유 관계를 조망하고 분석하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중심적 여항 인물들을 매개로 그들이 활동했던 무대를 폭넓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시도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다루어야 할 연구대상의 성격이 다양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 또한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기존 아날로그(analogue) 환경의 인문학 연구방법론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할 경우 연구대상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뚜렷하다. 예컨대 인물을 연구대상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다양한 신분의 여러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글쓰기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표(table)와 같은 시각화 방안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그 또한 대규모 인물 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어렵고 그들 사이의 명확한 관계 양상을 직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형식도 아니다. 이러한 한계점으로 인해 기존 연구 가운데 인물 간의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하였던 연구들은 대부분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관계망을 파악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연구범위를 축소하거나, 연구대상을 정리해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17)

    본 연구는 이러한 기존 아날로그 환경의 인문학 연구 방법론의 한계를 보완하여 인물들 사이의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망을 효과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방법으로 시맨틱 데이터(Semantic Data)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시맨틱 데이터18)란 개별 데이터

    17) 전근대기 인물간의 관계망을 구현하고 이를 시각화한 최근의 연구 사례로 백광렬(2017)을 거론할 수 있다. 해당 연구는 조선후기 양반 친인척 연결망을 정리함에 있어서 넷마이너(Netmeiner)라는 데이터 시각화 도구를 활용하였다. 네트워크 형식의 시각화 결과물을 통해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연구 방법론의 참신함을 발견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 개별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표(Table) 형식을 중심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점(154~178, 204~231, 238~243쪽)에서 종이 논문이 지닌 표현 형식의 한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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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하나가 고유한 것으로 기능할 수 있는 형식의 데이터로, 개별 노드와 노드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기에 최적화된 형식의 데이터이다. 연구대상을 시맨틱 데이터로 치환하여 연구대상간의 유기적 관계를 그래프 형태로 출력해서 살펴본다면 기존 아날로그 환경에서의 연구 결과물이 지니고 있던 시각적 한계를 보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연구대상간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연구대상간의 관계가 네트워크 형태로 유기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기존에 주목하지 못했거나, 또는 발견하지 못한 여러 정보나 지식들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착안하여 고문헌 자료 또는 역사 인물을 구체적 연구대상으로 삼아 시맨틱 데이터로 구축하고 그래프 형태로 출력하여 그 결과물을 들여다보고자 한 최근의 연구들이 있다. 김현·안승준·류인태(2018)19)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고문서 자료관 아카이브에 등재되어 있는 부안 김씨 문중 고문서를 대상으로, 문서와 문서 사이의 관계 및 문서 안에 담긴 인물, 노비, 물품 등의 정보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시맨틱 데이터로 편찬해서 들여다봄으로써 그로부터 어떠한 이야기가 발견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이재옥(2018)20)은 현전하는 방목 자료를 대상으로 그것들을 조사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과거 합격자 정보를 정리하고, 해당 인물들 및 그들이 속한 문중 인물과의 관계를 시맨틱 데이터로 치환하여 네트워크 그래프를 구현하였다. 해당 그래프는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인적 관계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방목 합격자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 엘리트 인적 관계망에 대한 본격적 분석을 시도하였다.21)

    류인태(2017)22)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고문서 자료관 아카이브에 등재되어 있는 덕천서원 관련 고문서 가운데 「덕천원생록」을 구체적 대상으로 삼아 그 안에 수록된 인물들 및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시맨틱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함으로써 1609년 덕천서원을 출입했던 원생들 사이의 구체적 역학 관계가 무엇인지

    18) “각각의 데이터가 하나의 커다란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고, 안에서 각각의 노드가 서로에 대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이터 네트워크를 ‘시맨틱 데이터’(Semantic Data)라고 한다” - 김현·안승준·류인태, 「데이터 기반 인문학 연구 방법의 모색: 문중 고문서 아카이브와 디지털 인문학의 만남」, 횡단인문학, 제1집,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인문학연구소, 2018, 39쪽.

    19) 김현 외, 위의 논문(2018).20) 이재옥,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의 디지털 아카이브와 인적 관계망, 보고사, 2018년.21) 류인태, 「디지털 인문학과 한문학 연구: 고문헌 자료 대상 국내 디지털 인문학 연구 사례

    를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제49집, 근역한문학회, 2018년, 58쪽.22) 류인태, 「「덕천원생록」과 시맨틱 웹 DB 연구」, 2017년도 한국선비문화연구원 학술대회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의 장기 연구 방향 모색” 자료집, 한국선비문화연구원 학술대회, 산청, 한국선비문화연구원, 2017. 12. 15, 87~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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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밝히고자 하였다. 세 연구는 연구 목적과 연구 대상이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문헌 자료 및 그 안에 담긴 인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연구에서 시맨틱 데이터베이스 편찬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연구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프 구조는 시맨틱 데이터베이스 편찬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시각화 결과물이며, 기존의 아날로그 환경에서의 글쓰기 방식으로 텍스트를 접근하였을 때 발견하기 어려운 관계가 그래프 구조로 드러남으로써 연구 대상에 담긴 새로운 이야기가 창출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시맨틱 데이터베이스 편찬 방법론을 활용함으로써 연구대상을 다각도로 폭넓게 살펴보고자 하였다. 연구방법론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본론의 첫 번째 장에서는 구체적 연구대상으로 삼은 세 문헌의 저자와 편찬 체제상의 특질이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다. 첫 번째 장의 분석 내용을 기초로 본론 두 번째 장에서는 시맨틱 데이터 구축에 기초가 되는 온톨로지(Ontology)를 설계하고, 설계된 내용을 바탕으로 실제 구축된 데이터베이스의 규모와 성격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본론 세 번째 장에서는 구축된 시맨틱 데이터베이스를 그래프 형태로 출력함으로써 데이터간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구체적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발견된 이야기들은 곧 여항전기집 저자와 입전인물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입전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구체적 근거이자 본 연구를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여항전기집 편찬 맥락의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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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19세기 여항전기집의 저자와 편찬 체재 및 특징

    1. 호산외사의 저자와 편찬 체재

    호산외사(壺山外史)의 저자 조희룡은 1789년(정조13) 5월 19일 아버지 조상연(趙相淵)과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23)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3) 7월 11일 사망하였다.24) 조희룡은 아내인 진주 진씨(晉州陳氏)25)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다.26)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1929)에 따르면 희룡(熙龍)은 그의 초명으로 후에 ‘熙’자를 ‘羲’자로 고쳤다.27) 조희룡의 자(字)는 치운(致雲), 이견(而見), 운경(雲卿)이고, 호(號)는 우봉(又峰), 석감(石憨), 철적(鐵笛), 호산(壺山), 단로(丹老), 매수(梅叟), 창주(滄洲), 석감(石憨), 매화두타(梅花頭陀), 향설관(香雪館), 적루거사(篴樓居士), 사연당(賜硯堂)이다.28) 조희룡의 본관은 평양(平壤)으로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15세 손이다. 평양 조씨 족보자료에 의거하여 조희룡의 가문을 살펴보면 조희룡의 8대조인 조진(趙糸進)이 진사시에 합격한 이래로 과거 합격자가 없고, 선대가 주로 무관직 벼슬을 지냈음이 확인된다.29) 조희룡의 고조부인 조근항(趙謹恒)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23) 전주 최씨 최한득(崔濩得)의 딸이다. 최신겸(崔信謙)의 손이자 최영(崔英)의 증손으로, 밀양 박복징(朴福徵)의 외손이다. 경인년(1770)에 태어나 갑술년(1814) 2월 18일에 사망하였다. - “全州崔氏 濩得女 信謙孫 英曾孫 密陽 朴福徵外孫 庚寅生 甲戌二月十八日卒”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간행년 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권9, 19b면.

    24) 연구자에 따라 조희룡의 몰년을 1866년 또는 1869년 이후로 보기도 하는데, 논자는 한영규(2000)의 주장 및 평양조씨대동보(平壤趙氏大同譜)(1994)에 따라 조희룡의 몰년을 1866년으로 보았다.

    25) 진주 진씨 진하창(陳荷昌)의 딸이다. 호군 진한명의 손이자 진국주의 증손으로, 낙안 김창욱의 외손이다. 정미년(1787)에 태어나 무신년(1848) 2월 11일에 사망하였다. - “晉州陳氏 荷昌女 護軍漢明孫 國柱曾孫 樂安 金昌郁外孫 丁未生 戊申二月十一日卒”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 권9, 19b면.

    26) 조희룡 연보는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 한길아트, 2005, 353~354쪽 ; 한영규, 앞의 논문(2000), 151~152쪽 을 참조할 것.

    27) 조희룡은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1929,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古朝58-가22-5-1-8) 권9 51면에 ‘趙羲龍’으로 올라가 있으며 초명이 희룡(初諱熙龍)이라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간행년 미상)에는 ‘趙熙龍’으로, 평양조씨대동보(平壤趙氏大同譜)(1994)에는 ‘趙羲龍’으로 기재되어 있다.

    28) 조희룡의 자(字)와 호(號)는 족보자료 및 조희룡이 남긴 문집 자료와 조희룡과 관련된 문헌 자료 등을 통해 정리하였다.

    29) 이성혜는 1994년 발행한 평양조씨대동보(平壤趙氏大同譜)에 의거하여 조희룡 세계도(世系圖)를 작성하였다. 이성혜, 앞의 책(2005), 355~356쪽.

    조희룡의 가문 및 관직 정보는 다음의 두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이성혜, 「趙熙龍 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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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하였고, 증조부 조태운(趙泰運)은 통덕랑(通德郞)을, 조태운의 장남 조덕기(趙德器)는 부사정(副司正)을 지냈다. 조상연의 양부(養父) 조덕순(趙德純)은 벼슬을 지내지 않았으나 생부(生父) 조덕인은 인산첨사(麟山僉使)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상연은 벼슬을 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는 여항인들의 시를 선집한 풍요삼선(風謠三選)에 「화서로상(華西路上)」이라는 시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조상연이 여항인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30) 조희룡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및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철종실록(哲宗實錄)31)에 따르면 액속(掖屬)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따르면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32) 조희룡의 장남 조성현(趙星顯)과 차남 조규현(趙奎顯)은 각각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과 통훈대부 행내수사별제(通訓大夫行內需司別提)를 역임하였다. 부호군(副護軍)은 체아직(遞兒職)이므로 실직(實職)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조희룡의 아버지인 조상연 대에 이르러 벼슬에서 멀어졌고, 주로 관에서 직임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33)

    앞서 서술했듯 조희룡의 아버지 조상연은 여항시선집에 시 한 편이 수록된 여항시인으로, 조희룡 또한 1861년 작성한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 서문에 ‘나 또한 여항인이다(余亦里巷人也)’34)라고 말하며 자신을 여항인이라 칭하였다.35) 그는 해당 시선집을 통해 천하 후대 사람들이 여항의 성시(聲詩)가 융성했음을 알길 바란다고 하였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최초의 여항전기집인 호산외사 편찬에도 반영되었다. 조희룡은 1862년 이향견문록 서문을 작성하며 여항인들은 언행에 기록

    硏究」, 경성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136~139쪽 ; 한영규, 앞의 논문(2000), 19~25쪽.

    30) 조상연의 자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일익헌(日益軒)이다. - “趙相淵字聖源號日益軒平壤人” 풍요삼선(風謠三選) 권4, 「조상연(趙相淵)」.

    31) 철종실록(哲宗實錄) 3권, 1851(철종2)년 7월 21일 을사 1번째기사.32) 한영규는 정조대 이후 규장각 계열의 서리들이 주로 오위장을 역임하였고 조희룡이 규장

    각 소속 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한 정황으로 보아 조희룡이 홍문관 또는 규장각에 소속된 서리로 헌종 말년부터 철종 2년까지 임금 주변에서 문한의 일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한영규, 앞의 논문(2000), 24쪽). 또한 한영규는 일성록(日省錄), 1844년(헌종10) 10월 25일條에 따라 그가 서원(書員)의 직임을 맡았다고 추정하였다.(한영규,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 학자원, 2012b, 211쪽.)

    33) 한영규, 위의 책(2012b), 210쪽 참조.34) 조희룡(저)/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역), 趙熙龍 全集 5-壽鏡齋海外赤牘 外, 한길아트,

    1999e, 173쪽.35) 한영규는 조희룡의 해당 발언이 그의 신분이나 처지를 나타내기보다 자신이 활동하고 있

    는 범주가 여항의 문화권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한영규, 앞의 책(2012b),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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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만한 것이 있거나, 그 시문에 전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저술하였다36)고 밝혔다.37) 현재까지 밝혀진 호산외사(壺山外史)의 이본은 총 4종으로 수경실 소장 필사본 호산외사(壺山外史), 규장각 소장 필사본 호산외사(壺山外史), 고려대학교 신암문고 소장 필사본 호산기(壺山記), 그리고 수경실 소장 필사본 이후시금록(以後視今錄)이다. 박철상(2013)은 호산외사 서명이 以後視今錄→壺山外記(壺山記포함) →壺山外史(錄→記→史)의 순서로 수정된 것은 자신의 저술이 여항인들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역사서라고 바라본 조희룡의 인식 변화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았다.38)

    본 논문에서 주 연구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수경실본 호산외사(壺山外史)로 1冊의 필사본이며 편찬 시기는 1854년 이후로 추정된다.39) 규장각본 호산외사(壺山外史)의 끝에 “호산거사는 조희룡의 별호이다. 갑인년(1854) 9월에 씀. 자손들은 영원히 보존하거라.”40)라고 적혀있는데 이를 통해 1854년 9월에 규장각본이 완성되었고 그 후 함진숭전이 추가된 수경실본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판본마다 입전 인물 수록 순서가 다를 뿐 아니라 그 내용에도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41) 앞선 세 판본은 총 39편의 작품에 42명의 인물을 수록했으나, 수경실본은 함진숭(咸鎭崇)이 추가 입전되어 총 40편의 작품과 43명의 인물이 입전되어 있다. 조희룡은 입전 기준에 대해 직접 밝히지 않았으나 호산외사(壺山外史) 서문에 자신이 ’직접 듣고 본 사람들’에 대해 전(傳)을 지었다고 하였다. 실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희룡이 직접 교유했거나, 교유하지 않았더라도 보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 인물들을 수록했음을 알 수 있다.

    36) 여항(里巷)의 사람에 이르러서는 이미 경술훈업(經術勳業)으로 칭할 수 있는 이가 없고, 혹 그 언행에 기록할 만한 것이 있거나, 그 시문에 전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적막한 물가에서 초목처럼 스러지고 만다. 아아, 슬프도다. 내가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저술한 바가 바로 이와 같다. - “...至夫里巷之人, 旣無經術勳業之可稱, 或有言行可記者, 或有詩文可傳者, 而皆草亡木卒於寂寞之濱, 嗚呼噫嘻! 余所著壺山外記之所以作也.” 유재건, 앞의 책(2008), 716쪽.

    37) 조희룡이 호산외사(壺山外史)를 저술하게 된 자세한 경위는 박철상, 앞의 논문(2013), 307~309쪽을 참고할 것.

    38) 박철상, 위의 논문(2013), 312쪽 참조.39) 호산외사(壺山外史)(수경실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철상, 위의 논문(2013)을, 실물

    이미지는 화봉갤러리 화봉책박물관, 추사·秋史를 보는 열 개의 눈: 추사 김정희 연행(燕行) 200주년 기념 전시회, 화봉문고, 2010, 50쪽을 참조.

    40) “壺山居士趙君熙龍別號也. 甲寅季秋書. 子孫永葆.” 조희룡, 호산외사(壺山外史)(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42면.

    41) 박철상, 앞의 논문(2013), 317~319쪽 【표1】, 【표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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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조희룡과 친분이 두터웠던 류최진(柳最鎭)은 “우봉(又峰)이 가까운 이들(近人)의 전기를 지었다”고 평했다.42) 조희룡의 현손(玄孫)인 조한주(趙漢柱)는 「조희룡전기(趙熙龍傳記)」를 통해 “호산외사에 열전을 실은 여러 선비와 더불어 서로 닦고 서로 궁구하시어 교분이 매우 두텁고 정이 따뜻하셨다.”고 하였는데,43) 이를 통해 조희룡과 수록 인물들 사이의 친분이 입전 맥락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조희룡의 친구라 밝힌 동해노려(東海老旅)는 이후시금록(以後視今錄)의 발문을 통해 조희룡이 100년 이내의 여항인 가운데 언행(言行), 문장(文章), 재능·기예(才藝), 유협(遊俠)으로 후대에 전할 만한 인물들을 선발하였다고 밝혀서 그 입전 기준을 파악할 수 있다.44)

    2. 이향견문록의 저자와 편찬 체재

    이향견문록(壺山外史)의 저자 유재건은 자(字)가 덕초(德初)이고 호(號)는 겸산(兼山)으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1793년(정조17) 아버지 유태훈(劉泰勳)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아내인 창원 이씨(昌原李氏)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고 1880년 졸하였다. 유재건은 협찬 개국 공신(協贊開國功臣) 유창(劉敞)의 15세 손이다.45) 이향순의 연구에 따르면 유창(劉敞)부터 6세손인 유신주(劉信周)에 이르기까지 당상관(堂上官)이었지만, 7세손인 유호(劉虎)부터 12세손 유천복(劉天福)까지는 당하관(堂下官)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13세손 유효성(劉孝誠)과 14세손 유세욱(劉世煜)은 추증받은 직계만 기록되어 있고, 15세손 유도항(劉道恒)부터 다시 관직을 역임하여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유재건의 조부 유상우(劉相祐) 대에 이르러 중앙 관서의 서리인 경아전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46) 유재건의 조부 유상우(劉相祐)부터 그의 부친 유태훈(劉泰勳), 그리고 유재건과 유

    42) 심호남, 「여항전기집 소재 일사형 인물전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138쪽 참조.

    43) 정옥자, 앞의 책(2003), 180쪽.44) 동해노려(東海老旅)가 쓴 이후시금록의 발문은 박철상, 앞의 논문(2013), 304~305쪽을

    참조할 것.45) 유재건 가문의 세계도(世系圖)는 이향순, 「이향견문록의 텍스트적 성격과 작가의식 연

    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9쪽을 참조할 것.46) 이향순, 위의 논문(2001), 9~1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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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건의 동생 유재진(劉在進)47)은 모두 규장각에서 서리로 근무했다.48) 규장각 서리는 서리 본래의 직역인 문서의 작성이나 등사 이외에도 도서와 문헌 편찬에 동원되었다.49) 또한 규장각 서리는 ‘선리(仙更)’라고 불릴만큼 서리직 중 최고의 명예직이었으며,50) 출세가 보장되었던 청요직(淸要職)이었다. 서리를 충원할 때도 문벌(門閥)과 필한(筆翰)을 가려 뽑았는데,51) 3대에 거쳐 규장각 서리를 역임했다는 것은 유재건의 집안이 문벌과 문한을 지녔음을 입증한다. 실제 유재건이 1857년 편찬한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유상우, 유태훈, 유상우의 증손 유한종(劉漢鍾)의 시가 실려있으며,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에는 유상우, 유태훈, 유재건, 유성종(劉聖鍾) 4대의 시 뿐 아니라 유상우의 외손 이경구(李慶九)·이경기(李慶紀) 형제와 박지번(朴枝藩) 그리고 재종손 유재소(劉在韶)의 시가 실려있다. 또한 장지연(張志淵)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권8에는 유태훈과 유한종의 시가 수록되었다는 점을 보아 유재건의 가문이 여항문인 집안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유재건의 아들 혜월거사(慧月居士) 유성종은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金大鉉)에게 사사 받은 재가자이다. 서수정(2016)52)은 유성종이 보광거사(葆光居士) 유운(劉雲)과 동일인임을 밝혔다.53) 유성종은 1846년(헌종12) 반감(飯監)에 임명되어 1878년(고종15)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고,54) 19세기 불서 수집과 편찬 및 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그가 편찬한 덕신당서목(德新堂書目)55)은 862종 5619권의 불서가 기록된 목록으로 해당 목록을 살펴볼 경우 그가 국내 불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불서도 소장한 장서가임을 알 수 있다.

    47) 유재진은 내각일력(內閣日曆) 1858년(철종9) 6월 22일條에 따르면 유재정(其弟劉在廷)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강릉유씨대동보(1994) 권1 998쪽에는 유재건의 동생으로 유재진(劉在進)이 등재되어 있다. 유재건뿐 아니라 유재건 재종들 또한 모두 그 이름이 책받침(辶) 돌림의 글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재정(劉在廷)은 유재진으로 추정된다.

    48) 자세한 내용은 한영규, 「규장각 서리 劉在建의 委巷文化 집성 방식」, 한국인물사연구 제22집, 한국인물사연구회, 2014a, 263쪽 참조.

    49) 강명관, 앞의 책(1997), 126쪽.50) 강명관, 위의 책(1997), 47쪽.51) 강명관, 위의 책(1997), 191쪽 참조.52) 서수정, 「19세기 佛書刊行과 劉聖鍾의 德新堂書目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53) 서수정, 위의 논문(2016), 129쪽 참조.54) 서수정, 위의 논문(2016), 280~281쪽 [부록1] 유성종 연보 참조. 55) 한영규는 유성종이 편찬한 덕신당서목(德新堂書目) 필사본이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소장

    되어 있음을 언급하였고(한영규, 「유재건(劉在建)의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 편성(編成) 방식(方式)과 그 특성(特性)」, 어문연구, 제42권,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4c, 275~276쪽.), 서수정(2016)은 구체적으로 덕신당서목의 구성과 체제, 내용, 편찬자 및 편찬 시기를 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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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종합하여 볼 때, 30년간의 규장각 근무와 유재건의 집안 배경은 풍요삼선(風謠三選) 편찬 → 소대풍요(昭代風謠) 중간(重刊) →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와 고금법어(古今法語) 편찬으로 이어진 흐름을 가능케 해주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처럼 다양한 문헌 자료들의 집성 경험을 토대로 유재건은 여항인을 대거 입전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은 그 서명(書名)에서 알 수 있듯이 이향(里鄕)에서 보고 들은(見聞) 이야기들에 대한 기록(錄)으로, 이는 「이향견문록서(里鄕見聞錄序)」와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이향견문록의례」에서 유재건은 ‘이향(里鄕)의 많은 자가 인몰되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애석하여 소문으로 듣고 직접 본 기록들을 여러 해 수집하였다’고 하였고,56) 「이향견문록서」를 작성한 조희룡은 ‘유재건이 직접 듣거나 보았던 인물이나 이야기에 대해 다른 문헌 자료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을 인용하거나,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유재건이 직접 저술하였다’고 했다.57)

    이향견문록은 10卷 3冊의 필사본으로 현재 규장각에 유일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작품은 287편으로 총 313명의 인물이 입전되었다. 이향견문록 「인용서목(引用書目)」에 따르면 인용서는 총 53종으로 겸산필기(兼山筆記)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인용되었다. 유재건은 ‘겸산필기 84칙에는 모두 주를 달지 않는다(兼山筆記八十四則並不懸註)’고 기록하였는데58) 겸산필기가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유재건의 ‘저서’를 칭하는 것인지 혹은 자신(兼山)이 기록(筆記)한 ‘글’을 칭하는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겸산필기에 이어 유재건이 가장 많이 인용한 문헌은 조희룡의 호산외기(壺山外記)(29편)이고 그 뒤를 이어 청구야담(靑邱野談)(15편), 진휘속고(震彙續攷)(14편), 삼강록(三綱錄)(13편), 정래교(鄭來僑)의 완암집(浣巖集)(12편), 장지완(張之琬)의 비연상초(斐然箱抄)(9편)와 침우담초(枕雨談草)(11편), 조수삼(趙秀三)의 추재기이(秋齋紀異)와 신광현(申光絢)의 위항쇄문(委巷鎖聞)(10편) 등이다.59) 주로 여항인들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는 점에서 이향견문록은 여항인들의 시선으로 포착된 여항인에 대한 기록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56) “里仁鄕善之可稱者 從古何限 而擧多湮沒無傳 寧不痛惜 爰輯見聞收曁 編爲十券...以謏聞寡見 累世蒐輯 所記不廣...” 유재건, 앞의 책(2008), 716쪽.

    57) “劉友兼山與余同情 蒐訪諸家集中 得立傳人若干 無傳者 自撰之 凡二百八十則 勤成一書 籤之曰 里鄕見聞錄.” 유재건, 위의 책(2008), 716쪽.

    58) 유재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1, 「인용서목(引用書目)」.59) 이향견문록 인용서와 관련하여 유재건, 앞의 책(2008), 14~15쪽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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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입전 기준 및 책의 전체 체제는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의례(義例)를 통해 유재건이 입전 인물을 8가지의 기준으로 나누어 10권의 책으로 엮었음을 알 수 있다.60) 이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해당 8가지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위의 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첫 번째는 유가적 전통에서 내적 덕목으로 여겨지는 네 가지 항목들이고, 두 번째는 외적 소양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에 해당하는 네 가지 항목들이다. 내적 덕목에 해당하는 네 가지를 살펴볼 경우, 그 순서에 있어서 일정 이상의 가치부여가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 유가(儒家) 가치에서 학(學)으로 대표되는 배움과 가르침의 덕목이 가장 먼저 언급되며, 그 다음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군주에 대한 충심 그리고 대장부의 용기를 이어 여성으로서 가져야 할 몸가짐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유가적 가치로서 삶을 통해 꾸준히 함양해야 할 앞서 덕목들과는 별개로 생활 속에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은 문장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장력을 갖출 경우 그것을 바탕으로 글씨나 그림과 같은 필묵(筆墨)에 대한 이해 또한 요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장력과 글씨 및 그림을 다루는 필묵에 대한 이해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이었다. 이에 비해 바둑, 악기, 점술 등 잡기(雜技)

    60)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의 내용은 유재건, 위의 책(2008), 40~41쪽 참조할 것.

    卷 기준 수록 인원 설명 분류

    1 학행사표(學行師表) 15 학문과 실천(군자의 덕목)

    내적 덕목2 효자충신(孝子忠臣) 56 효와 충3 영준호걸(英俊豪傑) 43 영웅호걸의 면모(용기)4 고금여범(古今女範) 31 유가적 가치에 충실한 여성5 문사고절(文詞高絶)

    73 문장력

    외적 소양

    6 문사고절(文詞高絶)7 문사고절(文詞高絶)8 서화(書畵) 47 가치있는 기예 9 일기일능(一技一能) 23 기예10 석도이적(釋道異蹟) 25 불교·도교적 가치

    〔표Ⅱ-1〕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에 따른 입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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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대한 이해와 유가적 가치와는 다소 거리가 먼 불가나 도가에 입각한 신이(神異)한 사례들은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덜한 것으로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편찬 체제는 유재건의 주관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으로서 유재건이 가지고 있던 특수한 시각으로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그 성격을 들여다볼 경우 유학의 전통적 가치관이 그대로 스며들어 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항인 또는 중인으로서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유가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따르려고 하였던 당대의 보편적 분위기가 이러한 편찬 체제에 반영된 것이라 판단된다.

    3. 희조일사의 저자와 편찬 체재

    희조일사(熙朝軼事)의 저자 이경민(李慶民)61)은 자(字)가 원회(元會)이고, 호(號)는 운강(雲崗)으로, 본관은 강양(江陽)이다. 1814년(순조14)에 태어나 1883년 졸하였다. 이경민은 대동시선(大東詩選)을 통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며 이덕함의 현손(玄孫)이라 알려져 왔다.62) 또한 성원록(姓源錄)을 참고할 경우 「강양 이씨(江陽李氏)」에 이덕함(李德涵), 이사룡(李思龍), 이언진(李彦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입전된 인물들이며, 이를 토대로 이경민의 세계(世系)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강양 이씨(江陽李氏)의 시조는 이개(李開)로 그는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개의 6세손인 이중비(李仲庇)가 전서(典書)로 강양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의 본관은 강양이 되었다.63) 논자는 이개(李開)가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조라는 점에 착안하여 기존 연구자 중 그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합천 이씨(陜州李氏) 족보 자료를 조사하였고, 이를 통해 이경민 가계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합천이씨대동보(인터넷판)와 합천이씨세보(陜川李氏世譜)(1864), 성원록(姓源錄)을 종합하여 정리하자면, 강양 이씨의 시조 이개(李開)의 20세손이자 이경민(李

    61) 이경민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그의 가문 또한 강양(江陽) 이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이경민 개인과 가계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두 연구를 제외하고는 자세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미희, 「해제-희조일사」, 희조일사(熙朝軼事),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1990 ; 박종선, 「희조일사 완역을 통한 내용 고찰」, 강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62) 이경민은 자가 원회이고 호가 운강으로 강양인이다. 진우당(이덕함)의 현손으로 순조 갑술생이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李慶民 子元會 號雲崗 江陽人 眞愚堂玄孫 純祖甲戌生 官止同中樞” 장지연, 대동시선(大東詩選) 권9, 「李慶民」條.

    63) 박종선, 앞의 논문,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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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民)의 7대조인 이갑남(李甲男)64)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고, 6대조 이원적(李元迪)은 동지중추부사(同知) 및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다. 5대조 이수량(李壽樑)65)은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을 지냈으며, 이경민의 고조부 이세억(李世億)66)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조부인 이덕함(李德涵)67)은 족보 자료에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추증받았다고만 기재되어 있으나 관찬 사료 및 문헌 자료를 통해 1757년 소근첨절제사(所斤僉節制使)68)와 창덕궁위장(昌德宮衛將)69)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70)와 자헌대부71)를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풍요속선(風謠續選) 발문을 통해 자헌대부에 이르기 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72) 【그림Ⅱ-1】은 합천 이씨 족보 자료와 성원록을 통해 정리한 이경민 세계도이다.73) 해당 세계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덕함의 장남이자 이경민의 조부인 이사룡(李思龍)74)은 동지중추부사와 경희궁위장을 역임하였고,75) 효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경민의 아버지 이기묵(李基黙)은 4남을 두었다는 기록 외에 인적사항이 기재되지 않았으며, 이경민 또한 족보 자료에 이름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기존 연구들의 경우 대부분 이경민의 가문을 역과에 급제한 인물이 많은 전형적

    64) 자는 자선(子先)이다.65) 자는 군숙(軍淑)이다.66) 자는 유년(有年)이다.67) 자는 경호(景浩), 호는 진우당(眞愚堂)이다. 이향견문록에 그에 대한 전(傳)인 「이진우당

    덕함(李眞愚堂德涵)」이 수록되어있다.68)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141책, 1757(영조33)년 2월 9일 신미 9번째條에 1757년 이

    덕함이 소근 첨사관직을 제수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以李德涵爲所斤僉使...“)69)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352책 1774(영조50)년 6월 19일 신축 16번째條에 이덕함이

    창덕궁위장이라고 기록되어있다.70) 일성록(日省錄) 1790년(정조14) 6월 24일條에 "한성부(漢城府) 가선대부 이덕함"이라고

    기록되어있다.71) 일성록(日省錄) 1799년(정조23) 1월 2일條에 1799년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자헌대

    부 이덕함(李德涵)에게 노인직(老人職)을 가자(加資)한다고 기록되어있다.("漢城府東部...資憲李德涵“)

    72) 성상(정조) 21년 정사년(1797) 음력 11월 상순 자헌대부 전행(前行) 동지중추부사 강양 이덕함이 발문을 쓰다. - “聖上二十一年 丁巳仲冬上浣 資憲大夫 前行同知中樞府事 江陽 李德涵 謹跋” 풍요속선(風謠續選), 「風謠續選跋」.

    73) 직계 정보는 족보 자료와 관찬 사료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74) 자는 현백(玄伯)이다. 이향견문록 권2 「이판윤사룡처고씨(李判尹思龍妻高氏)」는 이사룡

    과 그의 처 제주 고씨(濟州高氏)에 대한 전(傳)이다.75) 승정원일기 1816책 (탈초본 96책) 정조 23년 12월 20일 계묘 47/61 기사에 1799년

    이사룡을 동지중추부사에 단망으로 임명하고, 경희궁위장에 임명한다고 적혀있다. "...李思龍爲慶熙將,...同知單李思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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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중인 가문이라 보았으나,76) 성원록(姓源錄)과 합천 이씨 족보 자료를 통해 이경민 世系를 살펴보면 이원적(李元迪)77)의 자식들로부터 그 후손들이 역임한 관직의 성격이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량의 아우 이수륜(李壽崙)78)에서 후대 이언진(李彦瑱)에 이르기까지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역과에 급제하였으나, 이경민 5대조 이수량(李壽樑)부터 이경민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은 주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림Ⅱ-1】 이경민 세계도(世系圖)

    76) 심호남은 성원록(姓源錄)을 통해 이경민 世系를 따져보면 일가에 역과에 급제한 인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중인 가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심호남, 앞의 논문(2015), 35쪽

    77) 자는 이달(而達)이다.78) 자는 대숙(大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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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유재건이 편찬한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에 이경민을 비롯하여 이경민의 조부 이덕함(李德涵), 5촌 이기복(李基福). 형 이명열(李命說)의 시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름 있는 여항 문인 가문으로 이경민 집안이 알려졌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이 이경민이 희조일사를 편찬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희조일사(熙朝軼事)라는 서명(書名)은 ‘태평한 시대(熙朝)에 산일(散佚)된 일들’이라는 의미로 이는 곧 ‘기록되지 못한 채 흩어져서 없어져 버릴만한 여항인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수록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당 서명은 희조일사의 편찬 동기와 맞닿아 있는데 1866년(고종3) 홍현보(洪鉉輔)가 쓴 「희조일사서(熙朝軼事序)」79)를 통해 기록되지 못한 여항의 인물들을 추가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호산외사와 이향견문록 편찬 이후 희조일사에만 새롭게 수록된 인물은 8명으로 이경민이 기록되지 못한 여항인을 발굴하여 입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목적으로 편찬된 희조일사는 필사본뿐 아니라 이경민의 개인 서옥인 운강서옥(雲崗書屋)에서 활자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경민 가문의 경제적 상황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희조일사에 수록된 작품은 45편으로 총 85명의 인물이 입전되었다. 이경민은 이향견문록과 달리 모든 작품들을 기존 문집에서 인용하였다. 인용서목인 초촬군서목록(抄撮群書目錄)」에 따르면 인용서는 총 39종으로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인용한 작품이 13편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윤행임의 석재고(碩齋稿)(7편), 장지완의 비연상초(斐然箱抄)(6편) 및 침우담초(枕雨談草)(6편), 정래교의 완암집(浣巖集)(5편) 순이다. 참고로 유재건의 겸산필기도 3편 인용되었다. 희조일사 입전 기준 및 책의 전체 체제는 희조일사의 발문(跋文)인 「서희조일사후(書熙朝軼事後)」를 통해 드러난다. 발문은 이조판서 윤행임(尹行恁)의 아들 윤정현(尹定鉉)이 썼는데, 그는 희조일사가 효우(孝友), 충의(忠義), 문학(文學), 서화(書畵), 금(琴), 기(碁), 의(醫), 복(卜), 탁절지여행(卓絶之女行) 순으로 서술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79) 그동안 「희조일사서(熙朝軼事序)」의 작자는 남병길(南秉吉)이라 알려졌으나 한영규에 의해 홍현보가 남병길을 대신해 쓴 것임이 밝혀졌다. 홍현보와 그가 쓴 「희조일사서」에 대해서는 한영규, 앞의 책(2012b), 43~5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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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조일사의 편찬체제와 「이향견문록의례」(표Ⅱ-1)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학문과 실천을 중시했던 유재건에 비해 이경민은 효와 충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남녀의 구분을 떠나 내적 덕목을 외적 소양보다 중요하게 보았던 유재건과 달리 이경민은 탁절지여행을 희조일사 제일 마지막에 싣고 있다. 희조일사에서 분류되지 않는 인물 6명80) 중 4명은 세 문헌에 모두 입전된 인물로 김수팽과 유세통은 이향견문록 영준호걸(英俊豪傑) 항에, 신두병과 조생은 석도이적(釋道異蹟) 항에 수록되어 있다. 영준호걸(英俊豪傑)과 석도이적(釋道異蹟) 항에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인물을 수록했던 이향견문록과 달리 불교·도교적 가치에 해당하는 입전 인물의 수가 줄어든 점도 큰 차이점이다.

    4. 세 문헌 사이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특징

    19세기 여항전기집이 등장하기 전 여항인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전(傳)이나 야담(野談) 형식의 단편 작품으로 개인 문집 또�